시키오쿠리 시나리오 네타바레 바로 나옴 주의

 

관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 덕분에 기억 속에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겠죠 정말로 영광입니다 

2026. 7. 1. 04:27
2026. 6. 28. 00:55
나도 머리나 길러볼까?

  해가 저물면 시부야역 출입구에서는 젊은 남녀들이 자신을 팔고 있다. 귀엽고 멋지게 치장해서, 하이톤의 목소리로 전단지를 나누어준다. 나는 그것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버리게 될 전단지라도 일부로 가까이 다가가 한 장씩 받아 갔다. 그리고 그들이 안 보일 때 쯤, 눈 앞에 보이는 쓰레기통에 처 박았다. 역시 착한 짓은 언제 해도 뿌듯하다니까.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이 붐비는 교차로를 건넜다. 정해놓은 루트대로 걷기 시작한다. 평소 가던 헌책방, 평소 가던 카페, 평소 가던 공원. 시부야 시내를 크게 한 바퀴 돌고 있으니 갑자기 뒤에서 잡음이 들렸다. 실례합니다~ 잠시 시간 되세요? 바로 이렇게. 네, 무슨 일인가요?

  조금 있다가 약속이 하나 있는데 같이 가기로 했던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근데 형 멀리서 보는데 인물이 너무 좋더라고! 신비 주의 뭐 그런느낌? 에~ 그런가요? 완전! 혹시 얼굴에 그거, 분장인가? 아뇨, 안타깝게도. 옛날에 사고가 있어서. 그렇구나~ 근데 꽤 분위기 좋은데? 난 일부러 한 줄 알았어! 그런가요? 하하. 감사합니다. 혹시 시간 되면 대타 겸 놀러 가지 않을래?
 
  이런 것도 난파라면 난파라고 봐야 하나. 사람이 많은 만큼 예상치 못한 일도 많이 일어난다. 대충 보아하니 큰 자리는 아니고 네 명으로 이루어진 가벼운 술자리 겸 미팅인 것 같다. 호스트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질릴 때가 됐으니 오늘은 여기서 어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보다 좋은 촉이 말해온다. 정말 평범한 20대 남녀들의 자리일 거 같았다. 아니지, 길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대문짝만한 흉터를 가진 추남한테 같이 가자고 하는 거 보면 조금 다른가. 정말은 빼고 그냥 평범한 자리라고 정정해야겠다.
 
으음⋯ 오는 애들 예쁜가?
 
  가겠다고 확답을 하지 않았는데도 남자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친근하게 붙어온다. 물론이지! 안 그랬으면 형씨를 데리고 갔겠어? 저기, 신난 건 알겠는데 좀 떨어져 주었으면 한다. 어제 네 ** 긁은 손으로 멋대로 건들지 마. 당장에라도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나중에 일이 커질지도 모른다. 아비의 모두에게 혼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 이 정돈 참아주었다. 이 시간, 이 거리쯤 있는 남자들처럼 그는 빠른 속도로 말을 뱉는다.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이기 때문에 반절은 흘러들었다. 자기가 얼마나 곤란했고, 오기로 한 여자애들은 어떤 애들인지 궁금하진 않지만 들어야 하는 정보들이 머리에 꽂힌다. 제대로 입력했다. 난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온한 톤의 목소리로 성심성의 맞장구를 쳐준다. 이 사람은 나랑 동갑이라는 것 같다. 그래서 점점 말이 짧아지더니 어제 만난 친구처럼 날 대하기 시작했다. 가끔 벌레보다 못한 나보다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곤 하는데 오늘은 네가 그 벌레보다 못한 놈인가 보다.
 
  
 
  중간부터는 내 인생에 크게 남겨둘 필요 없는 정보와 장면들이기 때문에 행동을 하나 취하면 이전 행동은 바로 잊어버렸다. 내 머릿속 저장공간은 소중하니까. 뻔하지 않은가, 대충 모르는 젊은 놈들을 만나, 내가 알지도 모르는 가게에 들어가서 예약해 둔 자리를 잡고, 알코올에 취해 자연스럽게 각자 자신들이 원하는 분위기로 끌고 가는 것이다. 무언가 잘 되면 그건 알코올 덕분이고, 무언가 잘못되면 그것도 알코올 때문이다. 대개 생각 짧은 술자리는 다 이렇다. 그래도 성의가 너무 없지 않으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밝은 목소리로 활짝 웃으며 건배하는 내 모습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자리에 아주 성실하게 임하고 있는 사람이다. 옛날에 고도쿠한테 불려 다니던 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이따 감사의 의미로 안주나 사갈까.

  처음은 가벼운 인사로 시작해서, 취미나 가게, 좋아하는 노래 같은 사소한 주제를 대화 소재로 삼는다. 말이 트이고 자리가 편해지면 점점 자기 어필 턴이 다가온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직장에 다니고 있고, 직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각자의 썰들이 상 위를 오간다. 자신의 업적을 이 작은 무대에서 몇 번이고 과시해야 후련한 그들이 이 순간만큼은 사회에서 벗어나 그 누구보다 자기애가 넘치는 나르시스트가 된다. 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추켜세워줬다. 우와~ 멋져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물론 빈말은 하지 않고, 그들의 말에서 정말 멋지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집었다. 사람 구경이란 길거리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오가는 시민을 보는 게 아니라 이런 걸 말하는 것이다.

  몇 번이고 부딪힌 술잔과 점점 줄어드는 음식들. 시켜만 놓고 손도 안 댄 것도 있다. 그래, 그들이 시킨 것은 음식이 아니라 상대방이었다. 그럼 난 거기에 맞춰 열심히 입을 놀리면 된다. 날 데려온 사람도 이걸 원했을 거니까, 필요에 응한다. 하지만 만든 사람 성의가 있으니 일단 하나 입에 넣고 씹고 삼키고 말하자. 오, 이거 꽤 맛있네. 고도쿠가 좋아할 맛이야. 

  무르익은 술기운에 최근 힘들었던 일로 주제가 틀어진다. 그래서 너무 외로워서 나왔어요, 내 마음도 몰라주고 정말 너무한 거 있죠. 그러게, 섭섭하겠다. 몇 잔째일지 모를 술을 쭈욱 들이켜며 여자가 훌쩍거린다. 보아하니 곧 진심으로 힘들었던 일이 나올 거 같다, 난 여기서부터 정신을 잡는다. 내 목적은 이거였으니까.

  으응, 그랬구나⋯.

  머릿속 노트에 오늘 얻은 불행을 기록했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도 질세라 자신은 이렇기까지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했다. 나도 그럴듯한 말들을 꾸며내었다. 위로의 차원으로 건넨 마음은 진심이나 말은 거짓이었다. 몇 년씩이나 내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유능한 정보원을 따라한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납득한다. 자리의 흐름과 알코올의 힘이 더해지면 무의식적으로 사적인 정보를 경각심 없이 흘리게 되는 법. 그래서 나는 평소 거짓으로 내 이야기를 꾸며내곤 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공상의 세계에서 나라는 인간을 써 내려간다. 필요할 때마다 그 세계에서 꺼내쓰고 있다.

  나는 뭐 대충 살고 있는 줄 아나, 평소엔 연락 하나 없으면서 오늘도 전화 왔길래 그냥 끊어버렸어요.

  타인의 불행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난 그들의 불행을 위안 삼아 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있었다는 것, 내 머릿속 노트에 기록했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마음 깊이 공감해 주고, 특기인 말재주로 심화적이게 파고들면 무언가 술술 나온다. 나는 그것이 한 사람의 서사가 아니라 활자가 박힌 영혼이라 느꼈다. 계속 끄집어내다 보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해야겠다는 선이 보인다. 그럼 단칼에 끊어버렸다. 누구처럼 선 모르고 까불고 싶지도 않았고, 여긴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조금 더운데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어어, 그럼 같이 나가자! 나도 한 대만 피게.

  감정 표현이 격했던 여자와 날 데려온 남자, 두 사람이 같이 자리를 비웠다. 그들이 나가면, 뇌에 휴식을 가져다줄 때가 온다. 건너편에 앉은 다른 소녀는 우물쭈물 내 눈치를 살핀다. 이 정도면 익숙해질 법하니 슬슬 말 까도 괜찮겠지? 오히려 저 쪽도 좋아할 것 같고.

 

미안, 둘만 있으면 어색하지. 피곤할 텐데 조금 한숨 돌려. 아니면 너도 나갔다 올래? 아, 아니요! 저는 여기 있는 게 좋아요⋯.
  
  부끄럼을 타는 듯 시선을 피하는 소녀를 본다. 역시 정답이군. 다행이야.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가게 내부를 빙 둘러보고 있자면 다른 자리들의 대화들이 귀에 들어온다. 엿듣기라고 본다면 엿듣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면 그냥 일상 소음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타인의 일상을 듣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늦게 들어갈 거야. 아내는 이제 나에게 아는 척도 하지 않아⋯. 어차피 신경도 안 쓰는데⋯.
  아아, 마셔마셔! 여기 이거 한 잔 더 주세요.
  
  음. 일상 소음이다. (아마 다른 아비의 모두가 이걸 안다면 날 마구 팼을 것 같다.)

  무리에 섞여 오가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인생의 저점이란 평지가 아닌 것 같았다. 저 밑으로, 더 아래로 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하가 있다. 자신은 인간의 밑바닥에 다다랐다며 술에 취하거나 잔뜩 울어 붉어진 얼굴로 나에게 한탄하는 사람을 수십 명이나 봐왔다. 사회에 섞이지 못해 고립된 사람부터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폭행을 당하거나, 파산해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 정신이 망가져 자신을 잃은 사람.

  전자 화면 속 비트로 이루어진, 꿈에 그려낸 듯한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한계를 만들어선 안 되며, 인간의 가능성은 끝도 없으니 도전해 보고 이루어내보라고들 한다. 역시 배운 사람은 똑똑하구나. 그 말이 맞다. 인간의 한계는 정의 내릴 수 없다. 위도, 아래도 신은 공평하다.

  최고점, 최저점이라는 말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좁은 시야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자리에 끼어드는 것은 내 사소한 비일상의 유희다. 의미 없는 관계의 잔재를 주워 장난삼아 만지고 있는 것 같다. 폐물을 가지고 놀고 있다. 수신자도, 송신자도 없는 끊어진 전선으로 서로를 묶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녹슨 시계로 밤을 지낸다. 사실 정말 재미있는지 잘 모르겠어. 소꿉놀이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미안해, 기다렸죠!
  우리 슬슬 일어나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두 사람이 돌아왔다. 저 기류를 보아하니 다음 이야기가 예상 갔다. 아까 얘기했는데 -쨩이랑 나는 집 가는 길이 비슷해서 내가 바래다주기로 했어. -쨩은 쇼코 군한테 부탁해도 괜찮지? 물론, 당연하지.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남자를 응원한다는 듯 등을 두 번 팡팡 쳐줬다. 조심히 가. 옷쓰, 고마워! 덕분에 하나 건졌다.

  하하. 선 넘진 말고. 

  우리가 헤어지기 전, 가게 앞에서 남자와 함께 돌아가기로 했던 -쨩에게 말한다. 폰 배터리 몇이야? 으음~ 그건 왜? 30퍼센트쯤요. 충전시키고, 폰은 절대 손에서 놓지 마. 시간이 늦었는데 요즘 같은 세상은 그거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 어머,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그녀는 수줍게 입을 가리며 과장된 동작을 취해 보인다. 어깨 너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걱정 안 해도 되는데 뭘 저렇게 보는 걸까. 짜증나게. 관심 없으니 안심해. 네가 손 댄 건 더러워서 안 가질 거야. 뭣보다 이미 성가신 남자가 8년이나 붙어있는데, 굳이 또 성가신 걸 늘릴 리가 없잖아.

  전철 못 타면 어떡하나 싶어서. -군이 기다린다. 들어가!
  헤헤, 네에!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을 이리저리 삐죽 내밀던 남자가 언제 그랬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한다. 동년배의 사회생활을 모른 척해줬다. 조심해서 가~ 나도 화답하며 손을 흔들어준다. 역시 어른들과 하는 소꿉놀이는 내 적성에 맞지 않다. 간만에 의뢰가 없어서 들뜬 마음에 너무 설쳐 버렸어. 얼른 돌아가자.

  우리도 가야겠다. -쨩은 어디로 가? 난 이쪽이야.
  오빠 아까 많이 안 마셨잖아요. 조금만 더 어울려주시면 안 돼요?

  내 옷자락을 잡으며 울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소녀가 있다. 설마 하던 제일 곤란한 패턴이 찾아왔다. 타인과 단둘이서 있을 때 찾아오는 어색한 기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 공기는 어렵지 않았다. 사람 대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 어떠한 목적이 있고 분명한 의도를 품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람은 알기 쉬워지지만, 그에 반비례하듯 상황이 어려워진다. 대하기 곤란해진다. 그래. 어디 가고 싶은데? 눈앞의 소녀가 알기 쉬워서 거절하기 어려웠다. 조금만 어울려 줘야겠다.

  작은 이자카야에서 간단하게 주문을 한 뒤 소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여기 실내 흡연 가능한 가게인데 괜찮아? 소녀가 눈썹 한쪽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냄새는 이제 익숙해서 괜찮아요. 여기 음식이 맛있거든요. 사실 오늘 꼭 이 가게 음식을 먹고 싶어서 오자고 했어요. 소녀가 먼저 도착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곤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워 하는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잔 손잡이를 놓은 손을 상 아래로 숨겼다. 혹시 너무 잘 먹는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다 시켜놓고 시원하게 마셨는데 뭘⋯. 최소한을 제외하고 불필요한 신경은 하나도 안 쓰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하. 아니, 난 너보다 더 잘 먹어서 괜찮아.
  남자는 대 자로 먹어도 상관없죠, 그치만 저는 귀염성 없어보인단 말이에요⋯.

  기계처럼 눌러 찍어낸 듯한 사람이 되는 것보단 그런 개성 하나둘쯤 있으면 좋지 않나. 턱을 괸 채로 머들러로 애꿎은 하이볼만 계속 휘적휘적 저었다. 저건 원하는 대답이 아닐 테니까 네가 들을 리는 없겠지만. 아비의 모두가 보고 싶었다.

  근데 내 앞에서 이러는 건 내가 편하다는 뜻인가?
  네, 네?!
  기쁘네, 벌써 거기까지 넣어준 거구나.
  
  다정하게 눈을 맞추었다. 뭐, 뭔가 의지 되고 편해진달까 엄청 듬직한 오빠⋯ 같아서⋯ 저 같은 머저리의 결함도 덮어주실 것 같달까, 제가 뭐라고 하는 걸까요? 술기운이라고 생각해 버릴까요? 자꾸 부끄러운 말만 내던지는 것 같아...! 소녀가 횡설수설하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너.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당황한 상대를 보면 역으로 차분해진다. 

  요리는 잘해? 잘하죠! 저 제가 밥 차려 먹어요. 하지만 자기가 차린 밥은 계속 먹다 보면 질린단 말이지~ 역시 남이 해주는 게 제일 최고랄까. 그렇죠! 저도 그래서 가끔 시켜 먹거나 이렇게 밖에 나와서 먹는 게 좋아요. 오빠도 있어서 외롭진 않네요. 헤헤⋯. 오빠도 요리 잘하시나 봐요. 응? 할 줄은 아는데 메뉴가 한정적이라. 귀찮아서 거의 레트로트려나. 엣, 정말요!? 응. 정말로. 아⋯ 그래도 가끔 소꿉친구가 와서 밥 해주고 가긴 해.

  그래, 소꿉친구. 뭐만하면 담배만 뻑뻑 피워서 내 물건에 담배 쩐내를 묻히고 가고, 툭하면 우리 집 고양이에게 미움 받아서 마구 할큄 당하는데다, 속을 갈라보기 전까진 잘 모르겠는 그 녀석. 내가 밤늦게 집에 들어가도 어딜 다녀왔는지,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도 묻지 않는 그 녀석. 물론 본인도 그렇지만.

  자취하시는 줄 알았는데, 동거인이 있으실 줄은 몰랐어요.
  동거인은 아니긴 한데⋯ 뭐 얼마 전까지 동거했긴 했지.

  그렇구나⋯.
  남자야.
  헉, 제 머릿속 들여다보셨어요?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어.

  넌 알기 쉽다니까. 뒷말은 삼켰다. 근데 오빠 같은 사람은 혼자 살면 엄청 재미없어하실 것 같아요. 역시 누구랑 같이 있는 게 좋으신 거죠! 진작에 다 마셔버린 하이볼은 바닥을 보였다. 빈 잔의 부피를 얼음이 채우고 있다. 얼음을 하나 입에 넣고 웅얼거렸다. 우응. 혼자는 외롭다. 특히 이렇게 사람이 미어터지는 도시면 더. 와그작, 씹힌 얼음이 빠르게 녹아서 비어버린 입에 다시 얼음을 넣었다. 차갑다.

  일단은 고양이도 키우고 있어서 괜찮아. 앗, 고양이요?! 응. 엄청 의외다! 그런가? 네! 품종은 뭐예요? 흔한 길고양이지 뭐. 굳이 따지자면 검은 고양이려나. 그 외엔 잘 몰라. 관심 없고. 그냥 잘 자라기만 하면 돼. 사진 있어요? 보고 싶어요! 자, 여기.

 

  와, 엄청 귀여워요!

  그치?

  어, 이 옆에서 웃고 있는 남성 분은⋯

  아까 말한 내 친구.

  엄청 미남이네요!

  그렇긴 하지. 

  친구 분은 뭘 하시는 분이세요? 역시 쇼코 씨랑 같은 카페?


  남의 친구는 왜 궁금한 걸까. 얼굴이 잘나면 귀찮구나. 난 저렇게 안 태어나서 다행이다. 난 귀찮음을 뒤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얜 경리. 우왓, 의외라서 멋지다~ 갭모에네요. 표현 귀엽다.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뭘. 으읏⋯ 근데 얼마 전까지 같이 사셨으면 곁이 좀 허전했을 거 같은데. 쓸쓸하셨겠어요. 음⋯ 고양이 키우고 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직장 동료들도 자주 오고.

 

  일부러 거짓말을 치는 것 같지만 놀랍게도 사실이다. 최근엔 사토 씨가 우리집 고양이를 마구 만지다가 내가 사놓은 고가의 아이스를 갈취해 갔다. 그리고 그 저번엔 아키 군이 내 옷이 거지같다며 옷도 나눔하고 갔다. 비록 비싸고 아까워서 옷장에 처 박아 두기만 하고 있지만. 감사함은 느끼고 있다.

 

  그렇구나⋯ 그럼 여자친구도 자주 데려 오시는 편이세요? 아니. 여자친구 없어. 별로 생각도 없댔고. 앗, 정말요?

  그럼⋯ 지금은요?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뭐라는 거지, 이 아이. 급하게 젓가락으로 아무 안주나 집어 먹고 아무런 말이나 뱉었다. 아~ 내가 최근에 물어 봤더니 여전히 똑같던데. 자기 사는 걸로 급급한데 여자 만날 여유가 어딨냐 하더라. 


  앗, 그렇군요⋯

  미안, 도움이 되지는 못하겠네. 그래도 얘 마냥 좋은 애는 아냐.

  주제를 바꾸고 이야기를 끌어내는 건 사람들 사이에서 대개 나의 몫이었기에 대화의 주도권은 항상 나에게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대화를 리드할 때마다 약간의 부담감도 함께 따라왔다. 재미없게 해서는 안 되고,  늘어지게 해서도 안 된다. 남이 불쾌해해서도 안 된다. 세심하게 모든 걸 신경 쓰다 보면 피로해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마음 같아선 다 엿이나 먹으라 하고 싶다. 오늘 같은 날은 더 그랬는데, 가장 자신 있고 편한 주제가 나오니까 말이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쓸데없이 담배만 뻑뻑 피워서 담배 냄새도 엄청나고, 동물들에게 미움받는 녀석이라 매번 길고양이들이 볼 때마다 하악질해서 옆에 있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해. 본인은 오히려 익숙하다며 재밌다는 듯 웃지만. 그 녀석 꽤 미인이라, 항상 옆에 있을 때마다 난파 거는 여자들도 많아서 발걸음을 멈춘 적도 많아. 남자 친구로서는 완전 탈락이지?
  에~ 그렇구나⋯

 

  오히려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즐거운 척을 해야 하는 자리가 즐겁게 변해간다. 역시 남 얘기만큼 즐거운 게 없다니까.

  그리고 또 칸나기 씨는⋯
  근데요. 오빠, 저는 오빠 얘기가 듣고 싶은 거지, 오빠 친구 얘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닌데.

  아~ 그랬구나.

  이제 오빠 얘기해 줘요~
  나는 얘기하고 싶은데?
  네?
  응?
 
  아. 말이 헛나왔다. ⋯아니지, 얘기하고 싶은 건 맞으니까 헛나온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안의 사회성이 거기선 헛나왔어야 한다고 경보를 울린다. 나는 이 뇌의 경보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걸 생존 본능이라고 부르던가. 너무 신나서 혼자 떠들어 댄 것 같다.
 
  미안해. 그래도 좋은 점도 많은 얘라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 졌네. 너한테도 소개해 주고 싶어서 그랬어. 못마땅해하던 소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라인 교환 할래요? 연락주세요, 제가 시간 맞출게요. 라인 친구 코드를 핸드폰에 띄워 들이민다. 연락처 교환만큼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제 무덤을 판 꼴이 되어버렸다. 아마 그 녀석이 알면 코웃음을 살 게 뻔했다. 시간까지 맞출 필요는 없는데. 그런 친절함은 나한테 써 봤자 쓰레기 통에 버리는 꼴이니 다른 사람한테 써줘. 아까워.

  아까 사진이랑 오빠가 말하는 걸로 봐서는, 오빠랑 정반대의 사람 같은데. 다른 사진도 보여주시면 안 돼요?

  내가 왜?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억눌렀다. 평소에 걔한테 친구 좀 사귀란 말을 자주 하긴 하지만 이런 타입의 여자아이를 소개해 주고 싶진 않았다. 칸나기 고도쿠라는 남자의 성격은 이런 가녀린 여자아이와 상성이 최악이라고 생각하기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또는 일이 잘 풀려서 이 아이의 머리에 제정신이 박히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심란할 것 같았다. 그가 스스로 만난 인연이 아니라, 내가 연결해 준 인연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심란하다.

  사내 녀석 사진을 내가 왜 가지고 있겠어. 아까 그건 어쩌다 셔터가 눌렸던 거 뿐이야. 실물이 훨씬 멋지니까 나중에 직접 봐. 연락할게.

  친구 추가가 완료된 라인으로 귀여운 이모티콘이 뜨는 새 채팅창이 생긴다. 소녀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듯 베싯 웃으며 핸드폰 화면과 내 얼굴을 번갈아서 보았다. 미안해. 앞으로 영원히 연락 안 할 거고, 넌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랄게. 너의 자만추를 응원해.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너와 그 녀석은 부자연스러운 만남일 게 뻔하니까. 난 생판 남인 너한테 까지 욕을 얻어 먹을 정도로 궁핍하진 않아. 이미 아비의 모두로 충분해.

  오빠 다음에 꼭 봐요! 제 라인 답 하시는 거 잊지 마시구요!

   손을 흔들며 소녀를 먼저 떠나보냈다. 드디어 자유다. 나는 역 근처 흡연구역에 남았다. 밤이 늦었지만 불이 꺼지지 않는 시내엔 아직 사람이 많았다. 한 개비 피우고 돌아갈까 싶었으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낸 순간 집에 있을 내 고양이, 미코가 생각 나 도로 집어넣었다. 분명 지금 피우고 가면 역정을 내겠지. 내일도 아비 출근이니까 다치는 건 곤란하다. 담배는 그 여자아이를 한시라도 빨리 떼어내기 위한 핑계였으니 아무렴 좋았다.

  라이터와 담배를 주머니에 도로 넣고 핸드폰을 꺼냈다. 지도를 보고 지금 있는 곳과 집까지의 거리를 보기 위함이었다. 핸드폰을 켜자 라인 알림이 가장 상단에 떠 있었다. 맞다, 라인 교환했었지. 메시지를 읽지도 않고 고민 없이 차단했다. 읽음 표시만 남긴 채 돌아오지 않는 답은 상대방을 쓸쓸하게 만든다. 그러니 이게 나았다. 저쪽도 답하지 않는다면 차단당한 것이라고 깨닫지 않을까, 아니면 오늘 한 번 만났을 뿐인 사람이니까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는 것은 예의 빈말이었음을 눈치채주지 않았을까. 두 번은 만나지 않길 바라는 인연이었으니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추리해 본들 얻는 것은 없다.

  친구 리스트 창을 눌렀다. 다양한 사람들과 연락처 교환을 했어도 정작 가장 자주 연락하는 것은 한 번 스크롤 하면 끝인 즐겨찾기 탭이었다. 업데이트된 직장 동료들의 프로필이 떴다. 아, 유키. 새로운 옷을 샀나 보다. 잘 어울리네, 예쁘다. 본인에게 하면 좋을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건조한 텍스트보단 직접 말을 해주고 싶었다. 만나면 해주고 싶은 말이 하나 더 늘었다. 프로필 사진 속, 사랑스러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보는 건지, 액정 너머 나를 보는 건지 모를 시선을 마주하고 그리움을 느꼈다. 그리고 눈동자를 아래로 굴리니 방금 전까지 안주거리가 된 소꿉친구의 프로필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는 기본 프로필. 아무것도 없는 자기소개란. 여전하구나. 안심했다.

  창을 오른쪽으로 스왑하고 지도 어플을 켜서 지금 있는 곳과 집까지의 거리를 본다. 걸어서 가기엔 애매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늘은 하필 다른 사람들이 선수를 쳐서 남아있는 대여 자전거도 없었다. 정거장을 보니 전광판은 암전되어 있다. 버스도 끝났다. 결국 나는 얼굴 모르는 사람들과 한 전철을 타고 귀가 했다. 매번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전철의 안내음이 오늘따라 듣기 싫었다. 이유는 없었다. 쓸데없이 만들어 내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나만 아는 사실이다.

  전철에서 내린 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여기서 곤두박치면 어떻게 되려나. 엄청나게 아프겠지? 스마트폰을 찍고 개찰구를 나온다. 역 근처의 가게는 이 시간까지도 불이 들어와 있다. 일곱. 역에서 멀어질수록 거리에 보이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다. 여섯, 다섯⋯. 익숙한 골목에 들어선다. 가로등의 불빛이 하얗다. 넷, 셋, 둘⋯. 계단을 오른다. 문 앞에 섰다. 난 이제 비일상에서 벗어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하나. 집 앞 전등이 목적지에 도달한 것을 축하하며 불을 밝혔다. 오늘의 나도 장해. 이것 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안전하게 헤어져서, 무사히 집에 도착했잖아.

  차가워진 손으로 번호를 입력하면 도어락이 띠링 소리를 울리며 열린다. 문고리를 잡고 당기자, 체인이 어두운 틈을 가로질렀다. 정정해야겠다, 안 열린다. 아, 젠장. 오늘 그 녀석 오는 날인가. 나 집 들어가야 하는데.

  고도쿠. 열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열어줘. 왼쪽으로 가지런히 놓인 신발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열어. 굳게 걸린 체인이 이곳은 네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라고 말하는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은색 체인에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져 비치고 있었다.

  열라고.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 문고리가 덜컥거리는 소리, 체인이 찰랑거리는 소리, 귀를 어지럽히는 잡음들이 주위를 둘러싼 것 같았는데 일순간 그 모든 소리가 멎었다. 들리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뿐이다. 칸나기 씨. 열어줘. 열어달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턱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이것이 정말 내가 내는 소리가 맞나? 기분 나빠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다.

  고개를 들어 그 검은 틈 너머를 바라보았다.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자신의 백색 머리칼은 어둠을 삼키고 물들여 새카만 머리칼을 가진 채로,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 나는 저기 있구나. 내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어. 사물을 빌리지 않는 한, 스스로의 얼굴은 볼 수 없다고 하지만 저 검은 실루엣이 나를 향해 웃었으니 분명 내 얼굴도 미소를 띠고 있을 게 분명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웃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세상의 소리가 돌아왔다. 틈 너머의 나도 사라졌다. 인간에게 먹혀 조금은 퀴퀴할지도 모르는 4월의 밤바람이 휭 소리와 함께 나를 반겼다. 집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생활 소음이 들려온다.

  아, 미츠키.
 
  그가 느긋하게 방을 나와 미안하다 사과하며 걸린 체인을 풀어주었다. 내 얼굴을 보더니 무슨 일 있었느냐며 묻는 말에 문이 안 열려서 잠시 당황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나 5번이나 불렀어. 미안하다니까~. 왔으면 왔다고 전화, 하다못해 메시지라도 남기던가. 남겼어. 미전송으로. 그럼 안 보낸 거잖아. 농담일세. 사실은 나도 방금 막 온 참이였어. 오늘 저녁은 전골 어때? 이미 재료는 오면서 사 왔으니까, 미츠키 자네는 준비나 도와. 하⋯. 한숨을 쉬며 왼쪽으로 가지런히 정리된 신발 옆에 제 신발을 두고 집으로 들어왔다. 이제 신발장은 나를 놀리지 않는다. 비일상이 일상으로 돌아왔다.

  ⋯문.

  응?

  문에 체인, 왜 걸었어.
  으음. 그냥?
  네 집 아니고 내 집이야. 여기.

  알아.

  나 이제 너랑 안 산다고. 마음대로 하지 마. 나 성인 된 지 한참 넘은 거 알잖아.

  하지만~ 나한텐 여전히 아이인 걸.

  
  나는 말없이 다가가 쥐 죽은 듯 소리를 죽인 채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었다. 사람은 타인의 심장소리에 공명해 타인과 같은 심박수로 움직이게 된다고 들은 적이 있다. 난 그게 정말 좋았다. 이렇게라도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자네, 오늘따라 어리광이 심한데.

 

  심장의 주인이 말한다. 움찔거리는 변화가 느껴진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고개를 떼어 냈다.

  내가 이러는 거 싫어?

  그럴 리가. 평소에도 좀 의지해 주면 좋겠다는 거지.

  ⋯이미 하고 있어.

  좀 더 노력하도록.

  응.

  혹시 몰라서 미리 물 받아 뒀는데.

  근데 일단 손부터 씻을래. 오늘 더러운 거 너무 많이 만졌어.

  오늘 의뢰는 없는 걸로 알고 있었네만.

  그거 말고. 다른 일로.
 
   수도꼭지를 위로 올리면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온다. 손을 녹이려면 오른쪽으로 틀어야 했지만, 그냥 물이 나오는 대로 어제 꺼내두었던 비누를 사용해 두세 번 꼼꼼하게 씻었다. 손을 모아서 물을 받는다. 찬물을 얼굴에 몇 번 끼얹었다. 거울은 보지 않았다.
 
  ⋯미안.  그가 사과는 이웃들에게나 돌려주라며 수건을 내밀었다. 수건에 얼굴을 파묻곤 자신의 추태를 떠올렸다. 그렇네⋯. 현관에서 실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암전된 머리는 그것을 없었던 일로 치부해 버리려고 했지만, 그에겐 앞도 뒤도 전부 이어지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제 행동이 부끄러워져 수건을 얼굴에서 떼기 싫었다.
 
  물 데워지려면 더 걸릴 거야. 기다려.
  ⋯⋯⋯⋯.
  여차하면 같이 들어가 줄까?

  휙 고개를 들었다. 평소였다면 칼같이 아니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힘도 남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알겠다고 하고 싶을 정도로 난 지쳐있었다. 그 말이 퍽이나 다정하고 상냥해서, 한 번만 더 말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근데 고도쿠. 난 너의 그 원인 모를 상냥함이 기분 나빠서 참을 수가 없어. 어쩔 수 없는 자기 혐오가 올라온다. 지금 당장 죽고 싶었다.
 
  너는 나를 잘 아니까, 내가 답을 곧바로 내놓지 못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이 생각조차도 간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옛날처럼 순종적이게 수긍하고 따른다면,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했을까? 모든 걸 모른 채하고 받아들이면 편할까?

  그러기엔 세월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나는 내 미성숙함이 길을 못 찾고 방황하는 줄 알았는데 먼 길을 돌아서 가는 것뿐이었어. 변하지 않는 것이 이미 변했다는 증거였어. 나는 사람이라고. 인간이라고,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모든 사실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칸나기 씨⋯ 내가 여기를 떠난 뒤, 당신 옆에 생긴 공백이 여전히 텅 빈 채 주인이 찾으러오길 기다리고 있어줄까. 어리광 부릴 나이는 지났는데.

  내가 떠난 그 자리에 또 다른 쇼코가 여전히 그곳에 서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별말 없이 알겠다고 한다.

  이번엔 자해하지 말고. 저번에 피 치우는 거 꽤 애 먹었어. 양 엄청 많았으니까.
  미안해.
  알면 됐어.
  정말 미안해.

  (어라라) 이거 곤란하네~

  미안해.

  또 망가졌나.

  ⋯ ⋯.

  

  욕실 문을 닫았다. 눈 앞에 있는 남자에게 더이상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공기는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똑같았다. 물은 여전히 차갑게 식은 채, 바가지로 크게 물을 퍼서 제 몸에 끼얹으면 푹 젖은 앞머리가 눈에 창을 드리운다. 물을 머금은 옷이 몸에 달라붙었다. 무겁다. 무엇이? 그냥 전부.

  정면, 위. 나는 욕실에 작게 난 창문 사이로 검은 실루엣이 서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씻어내자. 전부.

2026. 6. 28. 00:44